줄거리
친애하고 친애하는, 스무 살의 공대 휴학 중인 주인공이 할머니댁으로 가서 할머니를 돌보아 드리라는 엄마의 전화를 받고 할머니 댁으로 향한다. 엄마는 어린 시절 '나'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미국 유학을 다녀온 교수로, 당신의 일이 더 중요한 사람이다. 홀로 남겨진 '나'의 결핍을 채워준 건 할머니. 염려와 사랑으로 보살피는 것이 모녀 관계라면 주인공 '나'에게는 그러한 사람은 할머니였던 것이다. 할머니를 간호하며 할머니와 함께 지내며 주인공 '나'는 할머니의 결혼 생활과 엄마의 삶에 대해 알게 된다. 할머니는 폭력으로 가득 찬 삶을 살며 엄마와 아들을 낳았고, 하나뿐인 아들을 사고로 떠나보내며 그러한 아픔을 딸을 통해 극복하려 했던 할머니의 삶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인생을, 못다 이룬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꿈을 대신 살아내기 위해 어린 '나'를 홀로 두고 유학을 떠나야만 했던 엄마의 삶 역시 이해하게 된다. 이후 '나'는 엄마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하고 조금씩 긍정하게 되지만 아직도 엄마를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관계는 할머니와 엄마의 관계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난다. 그러던 중, '나'는 '강'과의 관계에서 예상하지 못한 임신을 하게 된다. 엄마가 될 준비 없이 맞이한 엄마로서의 삶은 나의 엄마의 삶을 다시 사는 것이었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나'는 '나'의 삶이자 엄마의 삶, 그리고 할머니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게 된다.
인상깊은 구절
- '알고보니 할머니들은 수십 년째 복날이면 같이 삼계탕을 나눠 먹고 있었다. 복날에는 삼계탕을 나눠 먹고, 정월 대보름에는 오곡밥을 지어먹고 동짓날에는 팥죽을 쑤어 함께 먹는 사이.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좋은 날 같이 보낼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라고 할머니는 언젠가 내게 말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보면 할머니를 살게 했던 사람들은 나나 엄마가 아니라 아가다 할머니와 글로리아 할머니였는지도 모른다.' 할머니의 옆을 지켜주던 아가다 할머니와 글로리아 할머니의 우정이 돋보이는 구절이었다. 혼자가 된 할머니 옆에서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고 서로를 걱정하며 지켜주는 일상을 읽는 내내 평온하고 아늑한 느낌이 전해지기도 했다.
- '아니야. 무리해 그럴 거 없어. 결혼해 아이만 키우는 것도 좋은 삶이지." 엄마의 말을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던 적도 있었지만 사실 나는 그런 행동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타인이 하는 모든 말의 의도를 어떤 식으로든 알아낼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많은 경우 세상의 그 누구도 어떤 말의 - 심지어 자신이 할 말조차도- 의도를 명확히 아는 사람으은 없으니까. 나는 다만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엄마의 그 말이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성공했으나 남편의 외도와 딸의 거듭되는 방황을 수차례 목격한 여성이 조금쯤의 자책과 회한을 담아 이제 막 엄마가 되려는 어린 딸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전한 진심이었을 수도 있다고 추측하는데 이르렀을 뿐이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딸이 느끼는 엄마에 대한 서운함, 딸이 자신이 걸어왔던 삶을 고스란히 살아갈지도 모른다는 엄마의 슬픔과 불안함이 느껴졌다. 서로의 간극을 무색하게 만드는 사랑이 담긴 말들인 것이다.
총평, '친밀히 사랑하는 나의 엄마에게'
할머니의 불행했던 삶. 딸을 유학보내고 하염없이 부두에서 바다를 바라보던 할머니. 바다 건너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 딸을 자신의 삶과 동일시했던 것은 아닐까. 할머니의 삶과 그로 인한 엄마의 삶에서 엄마가 짊어져야 했던 무게를 가늠해보며 엄마에 대한 서운함을 뒤로하고 엄마의 삶을 이해해보려 노력하려는 것이다. 자신 역시 엄마가 되고 나서야 할머니와 엄마의 치열했던 삶을 살아내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딸은 엄마가 도전하고 꿈을 이뤄가는 모습을 보며 자신 역시 꿈을 꾸게 된다. 단지 이 소설이 엄마와 딸의 갈등으로 읽히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더 많은 자유와 사랑이 넘치기를 바라는 세상 모든 '엄마'들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또 우리의 딸은 더 자유롭게 더 사랑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친애(親愛)하다, 친밀이 사랑한다는 이 단어는 우리의 엄마들에게 어쩌면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일지 모른다. 나의 자유와, 나의 평안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줘서 감사하다고, 친밀히 사랑하는 우리의 엄마들에게 마음을 전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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